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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그릇 : 상처 받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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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척척석사 민준 2024. 7. 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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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9일 목요일

청소년기에 나의 말은 가시가 가득했다. 가시가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 배려하면서 말을 해야하지? 나 좋다는 사람만 데리고 가면 되지 왜 나 싫다는 사람에게 잘보이려 해야하지? 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런데 타인에게 말로 상처를 받다보니, 말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글은 안읽으면 그만이고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말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귀를 닫고 다른 생각을 채우려 해도 그 말이 가진 가시가 나를 찌르면 그 말과 그 말에 대한 생각들로 나를 가득채우게 된다.

그릇을 만들때, 모양을 잡다보면 흙속에 있던 기포가 나온다. 이 기포를 잡지 못하면 그릇은 굽는과정에서 터질 수도 있고 깨질 수도 있다. 그래서 흙을 계속 매만지고 매만져야 좋은 그릇을 만들수 있게 된다. 저자는 말도 그렇다고 한다. 마음속의 말을 계속 다듬고 다듬어야 말그릇이 커지고 견고해지고 단단해진다.
작은 말그릇은 말을 담을 공간이 없고, 말이 쉽게 흘러넘쳐버린다. 그래서인지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게 된다. 반면 큰 말그릇의 특징은 많은 말을 담을 수 있고 담은 말이 쉽게 새어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담은 말 중 필요한 말을 골라낼 수가 있는 것이다.
말그릇이 큰 사람은 말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말을 담을 수 있고 그래서 말과 사람을 분리할 수 있다. 상대방이 아무리 날카로운 말로 자신의 마음을 쑤셔대도 그것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의심하지 않는다 (p36)
사실 이 책을 몇번이고 읽었지만, 말그릇이 정확하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소화한 내용은 ‘말’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말그릇의 크기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이 튀어나가는 것이다. 그 어떤것은 생각일 수도, 감정일 수도, 혹은 두가지 모두일 수 도 있다. 나는 상대가 말을 하면 보통 그 말이 그 사람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저 말이 가지는 의미가 뭐지? 나에대한 비난이 그 말속에 있는 생각인가? 나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나? 나를 나쁘게 생각하나? 이런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끄집어낸 그 생각들이 내 감정을 상처주게 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마를 탁 치게 하는 통찰이 있었는데, 그건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 습관’** 였다.
말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기 전에 항상 먼저 작동하는 것은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감정을 모른 척할 정도로 지쳐있는 사람들은 여러 감정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다양한 감정을 몇가지 감정으로 대체해서 사용한다. 당연히 말도 그 감정을 따라간다. 감정을 짜증이나 우울함으로만 표현하는 사람들. ... 감정은 원래 마음을 보호하고 관계를 유지하게 돕는다. 그러나 감정과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감정의 순기능을 사용하지 못하고 가짜 감정을 휘두르며 대화한다. (p82)
발달심리학자인 보울비(bowlby)는 우리는 매일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고 적절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머릿속에 공식을 만들어간다고 설명한다. 공식은 말하자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틀과 같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공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거나 공식에 스스로 갇혀있거나 상대의 공식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놓고 잘잘못을 따진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기보다는 편을 가른다. (p85)
마지막으로 자신의 말 습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한다.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영향을 받은 건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뒷조사를 하다 보면 말의 출생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자신이 말을 주도해야 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감정을 세밀히 구분해서 그에 맞는 말을 고를 줄 아는 사람, 고정된 생각에 갇혀있지 않고, 습관적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만이 말 때문에 후회하고 실망하고 탓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상대방의 말에 의도가 있고 주로 부정적으로 그 의도를 해석해왔었다. 그건 아마 타인이 아무이유없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을꺼라는 그런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다른 친구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다보니 어느순간 거절이 어렵게 되었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모두 부탁을 들어줘야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던거 같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가 피곤해지고 주변사람들은 챙겨줘야 할 존재로만 인식하게 되었던 거 같다.
내가 가지게 된 잘못된 말 슴관은 여기에서 비롯된 거 같다. 나는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고, 에휴 이러다 죽겠다. 차라리 죽고말지 라는 말을 자주하곤한다. 정말로 죽고싶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나의 힘듦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감정을 이렇게 피로와 힘듬, 귀찮음으로 바꾸어 표현해버린다. 하고싶은게 있더라도, 저걸 하면 피곤하겠지? 라는 말이 먼져 나와버린다.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갈등에서 가지게 되는 감정과 생각이 피로감과 힘듬으로 표현되어 나가버리니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관계는 단절되어 버리곤 한다.
나의 말을 먼저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생기기 시작했다. 직장상사의 짜증은 나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본인이 느끼는 어떤 감정을 짜증으로 배출해버리는 사람이구나 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니 나를 이해하게 된 만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크기가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말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자꾸만 힘들다 귀찮다 피곤하다로 나의 익숙한 공식에 따라 맞추어 살지말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잠깐 멈추어 생각하려고 한다. 선배가 일을 시키면 피곤하다라는 내면의 습관이 올라오지만, 그 피곤은 사실 일을 잘 끝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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