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MBTI에서 N 성향이 유독 강하다. 다른 성향은 55 : 45 정도로 우세하면 N은 80 : 20이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엄밀한 의미의 이해보다는 그 과정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여전히 재미있다. 물리학을 전공했던 이유도 실험과 관측으로 발견한 규칙을 수학으로 이해하는 프레임워크가 이해되면서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KT에서 진행한 해커톤인 크롬프톤도 처음엔 모르는 걸 해야 해서 괴롭기만 했는데 AI 도구와 업무방식의 프레임워크를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즐겁게 준비할 수 있었다.
사실 크롬프톤 신청 직전까지는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같이 할 사람도 없는데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부장님이 한번 나가봐라 하시고. 월급 받고 하는 일이니까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때마침 가평 지역의 폭우로 문서 작업이 많았는데, 이를 자동화하는 프로젝트를 성공하고 나서 자신감도 생겼었다. 문서작업 자동화를 넘어 AI를 활용하여 복구계획을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과제를 기획했다.
'재난 발생 시 복구 지역과 복구 계획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에이전트'를 주제로 과제를 제출했다. 기반 자료를 자동화하는 작업은 이미 끝냈고 시각화는 이미 다른 부서에서 관리하는 Power BI와 연결하면 중간에 에이전트만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초기에 복잡한 토픽구조로도 맥락이 부족해서 복구계획을 제대로 만들어주지 못했었다.
이전에 A2A(Agent to Agent) 관련 자료를 보고 데모 구현을 해봤는데 Copilot Agent에서 A2A 프레임워크를 활용하니까 풀리지 않던 문제가 간단한 토픽 구조와 에이전트 지침 프롬프팅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이 되었다.
그래서 2주라는 짧은 (실직적으로는 5일) 기간 안에 Agent를 만들고 발표자료와 기술문서와 프롬프트를 정리할 수 있었고 운 좋게 상위 20위 팀에 들어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문제는 대회 당일, 하루 종일 AX 강사 활동이 있어서 본선대회에는 프로젝트를 잘 모르는 팀원만 보내야 했었다. 내가 직접 갈 수가 없으니 대회 전날까지 PPT, 그리고 20개의 질문-답변 쌍과 팀 소개 영상까지 혼자 만들어 전달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1시간 30분 만에 구의에서 원주까지 130km/h로 달려 도착했지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다른 팀들을 보니까 이미 전사배포된 과제를 가지고 온 팀도 있고 개발부서에서 와서 기술적으로 완벽한 다른 팀들의 멋진 발표를 보니 더욱 주눅이 들었다.
결국 10분간 무대에 올라가서는 꾸밈없이 진솔한 이야기를 했다. 가평에서 밤새 자료를 만들고 복구 계획을 세우며 힘들었던 이야기,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어디서부터 복구해야 할지 막막했던 경험들을 현장의 관점에서 전달했고 그런 마음으로 만든 Agent를 있는 그대로 발표했다. 사실 이 대회의 취지는 MS의 Copilot Agent를 얼마나 잘 고도화하느냐였는데, 그저 업에서 있었던 내 이야기를 하고 내려왔다.

당일에는 '뭐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조금 후회된다. 조금 더 치밀하게 준비했으면 달랐으려나, 수치화된 근거를 더 찾아올걸, 과제의 의도와 목적을 좀 더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에 1주, 자료 만드는 데 1주 걸린 과제가 2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다. 발표에 사용한 내용도 PPT에 있던 자료가 아니라, 장애 대응을 하면서 귓동냥으로 들었던 내용을 무대에서 기억해 이야기했다. 순발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내가 가진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볼 수 있었다. 준비된 게 없는 상황에서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순발력 없는 내가 이만큼 성장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올해 시작했던 사내강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직무 전문성을 키우기 어려운 BO부서에 들어와 다른 스킬을 키워보자고 시작한 사내 강사 활동이, 사람 앞에 서는 것을 조금 더 당당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번 크롬프톤 경험을 통해 저는 세 가지 강점을 더욱 확실히 발견할 수 있었다.
1. 다양한 인풋을 무시하지 않고 빠르게 익숙해지는 능력: 기술 관련 유튜브, 깃허브 블로그 글 등 다양한 정보를 실험해 보며 빠르게 익혔고, 덕분에 문제를 해결하고 과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2. 사내에서의 실력 인정: 그렇게 완성한 과제가 사내 20개 과제로 선정되어 본선에 나갔다는 것은, 그래도 사내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3. 순발력과 위기 대처 능력: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뻔뻔하게 위기를 넘기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1. 발표를 고려한 자료 준비 부족: 자료를 만들 때는 항상 발표를 염두해 놓고 만들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근거가 되는 숫자나 도표 없이 전부 순발력으로 채워야 했던 점은 앞으로 개선해야 할 부분이다.
2. 문제 해결에 대한 끈기: 에이전트 개시가 안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해도 7위 안에 들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그냥 방치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해봤어야 했는데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핵심 강점을 다시 한번 정의할 수 있었다.
1. 일상 속에서 잘 배우고, 그렇게 배운 것을 잘 써먹어 성과를 낸다.
2. 엄청 애쓰고 밤새워 해내기보다는, 효율적이고 '가성비' 있게 일을 해낸다.
내년엔 또 어떤 팀에서 일하게 될지 모르지만 올해처럼 다양한 곳에서 인풋을 얻고 내 능력으로 만들자. 연초엔 사실 엔지니어로 전문성을 길러야 하는 사원시기에 차석부서에서 BO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는데 내 방식으로 성과를 내고 센터 내에서 비계량실적을 만들어냈다. 내년에는 더 많이 도전하고 더 많이 성과를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