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내가 얻은 문장은 니체의 유명한 말이다. ‘왜’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이 책의 저자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동력이 바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가 무너져내린 빅터 프랭크는 나치 수용소에서 이 책을 남겨야 겠다는 이유로 버텼다고 한다.
요즘 나는 연구실에서의 물리적, 정서적 압박속에서 저자가 말하는 ‘삶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죽음에서도 의연할 수 있으며, 인간은 인간이기에 모든걸 놓아버리고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왜 살아야하는가? 삶을 살아갈 목적과 이유 하다못해 수단이라도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살아있어도 죽은 상태가 된다.
저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을 강조한다.
그건 그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직접 경험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인간은 살아있어도 죽게 된다.
죽고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마음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의지가 사람답게 살지못한다면 차라리 ‘죽고싶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럴때는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서 행복하게 지낼 순간이 찾아오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망조차 좌절되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좌절의 시간들이 영영 이어진다면. 그럼에도 살 수 있을까?
내가 살아갈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루고 싶은게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19세기 귀족들도 누리지 못한 영화를 누리면서도 삶이 공허하고 의미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삶을 지속할 힘이 없게 느껴질까?
나는 어쩌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의미를 거세 당한게 아닐까?
어렸을 적부터 해야할 일들이 계속해서 주어졌다. 하고싶은 일들이 아닌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만 성취와 보상이 주어졌다.
초등학생때 읽은 마시멜로 이야기에서는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성공한다고 했다.
그렇게 훈련을 받다보니, 어느순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 좋은 것들로 인생이 채워졌다.
있으면 좋을만한거 예를 들면 좋은 학점, 토익점수, 이런저런 자격증들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주어진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시기가 왔을때 나는 선택이 너무나 어려웠다.
주어진 길이 더이상 없을때 보상을 약속해주는 일이 없을때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걸까?
사람은 언제가 죽고, 건강과 기회라는 자원이 한정되어있기에 선택은 항상 강요된다.
좋은 선택을 위해 어렸을때부터 훈련된다. 그래서 오히려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끝이 정해져있는 삶이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
내가 느낀 학창시절은 대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대학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과정으로 생각되었다.
나의 노력은 타인의 노력과 비교당했고, 나의 열정은 타인의 열정과 비교당했다.
비교는 이기는 인생도 지는 인생도 의미없게 만들어버린다.
이기는 인생도 다른 이기고 올라온 인생들과 비교당할 것이고, 비교대상이 없어지면 그걸로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는 인생은 승리할 때까지 의미가 없는 인생이 된다.
나의 청소년기는 삶이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시기였다.
불안정한 시기였고 대학이라는 어떤 열매가 있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구약성경 시편 1장)
복이 있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 반대의 죄인은 복이 없는 자이다. 성경은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의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한다.
복이 있는 사람을 비유할 때 시냇가의 심은 나무로 비유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물에 뿌리를 깊게 내려서 성장한다.
악인은 복이 없는 사람이며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로 비유한다.
나무와 달리 겨는 뿌리 내릴 곳이 없다.
의인과 악인 모두 바람을 맞지만 의인은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이기때문에 설사 가지가 다 부러져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악인은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날아가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물가는 진리를 의미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 - 59) 라는 말씀도 있기에 맥락을 따지면 시내의 물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성경을 의미할 것이다.
복이 있는 사람은 햇빛과 거름이 풍부한 땅에 자라는 꽃이 아니다.
물가에 심겨져 있지만 뿌리는 스스로 내려야한다.
거름과 양분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시내에서 뿌리내릴 곳을 찾아야한다.
게다가 겨가 바람에 날릴때 시내의 나무도 바람에 날리게 된다.
복이 있는 사람도 똑같이 고난을 겪는다는 의미이다.
아직 이십대지만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그 속도를 느끼게 된다.
거리에 가득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거리의 큰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다.
좋아했던 음식점이 없어지고 좋아했던 카페가 사라진다.
잘나갔던 기업들 조차 시대에 풍파를 맞아 꺼져가고 있다.
내가 살고있는 세상이, 내가 뿌리내렸던 지식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플라즈마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10년 뒤에도 이렇게 승승장구할까? 아닐지도 모른다. PDP 티비처럼 어느순간 사라져버리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없어질 기술에 뿌리내리는 걸까? 나는 무엇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걸까? 복이 없는 악인처럼 세상이 바뀌면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그냥 사라져버리게 될까?
착하게 사는게 의인이 아니다.
자신의 뿌리가 굳건히 있는 자가 의인이고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진리안에서 자유를 느끼는 자야만 거센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나는 삶의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왜 사는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석사라는 길은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는 길이다.
지금의 삶의 이유는 학문적인 성취와 인정이었던거 같다.
불행의 이유도 행복의 이유도 학문의 성취와 인정인것 같다.
내가 딛고 있는 학문적인 성취는 무엇일까? 교수님께 인정받는 논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 실리는 것?
이것들이야 말로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닐까? 바람은 외부에서 불어온다.
시련과 변화는 바깥 세상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긴다.
내 의지와 관계없는 외부의 인정과 칭찬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결국 뿌리는 내 스스로 내리는 것이다.
새로운 냉전체제와 에너지 안보문제 (원자력발전소와 우라늄 ETF) (0) | 2022.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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